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KBO 리그/역사 (문단 편집) === 1998년~2007년 === || [[파일:external/weekly.donga.com/200701240500038_2.jpg|width=400]] || [[파일:암흑기잠실.jpg|width=400]] || || [[현대 유니콘스]] 우승 모습. || 당시의 [[잠실 야구장]]. || [[한국프로야구/1998년|1998년]]에는 정민태와 [[박재홍(야구)|박재홍]]이 각각 마운드와 타석에서 활약한 현대가 그간의 설움을 딛고 첫 우승컵을 들어올리게 된다. 외국인 선수 제도가 최초로 도입되었으며, 이 당시는 초창기였던만큼 실력보다도 낯선 한국 문화에 대한 적응력이 용병 농사의 성패를 갈랐다고 한다. 하지만 IMF 사태와 스타들의 해외 유출로 인해 관중이 다시 200만명대로 떨어졌고 프로축구 [[K-리그]]에 따라잡힐 위기에 처했다. IMF 외환위기로 인해 극심한 자금난에 빠진 두 호남 구단 해태와 쌍방울은 구단의 존립을 걱정해야 할 처지로 전락해 버렸다. [[한국프로야구/1999년|1999년]]에는 KBO 최초로 양대리그제가 시행되어 전년도 시즌 성적으로 매직 리그, 드림 리그 두 리그로 나뉘어 시즌을 진행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종합 1위 두산을 꺾고 올라온 한화가 정민철-송진우-구대성의 레전드 투수진에 힘입어 롯데를 꺾고 20세기 최후의 우승팀이 되었다.[* 사실 20세기는 2000년까지이므로 20세기 마지막 우승팀은 현대지만, 현대는 구단이 해체를 했다.] 지금은 거품이니 뭐니 하는 [[KBO FA제도]]가 처음 시행된 것도 이 해. 시즌이 끝나고 현금 트레이드로 겨우겨우 연명하던 쌍방울이 해체 통보를 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그 선수단을 [[SK 와이번스]]가 이어받아 인천으로 떠났다. [[한국프로야구/2000년|2000년]]에는 모두의 예상대로 정민태-임선동-김수경의 18승 트로이카와 박경완, 박종호, [[박재홍(야구)|박재홍]], 이숭용 등 올스타급 타선을 구축한 현대가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무리한 서울로의 연고이전을 추진하다 돈 문제로 수원에 눌러앉게 되어 연고권도 증발하고 인천, 수원 양쪽의 팬들에게서 외면받아야 했던 아픔이 있다. 한화의 송진우가 이 해에 기록한 노히트 노런은 2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국내 투수 최후의 노히트노런으로 남아 있다. 최초로 시즌을 중단하고 나선 국제대회인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일본을 이겨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프로야구/2001년|2001년]]에는 전년도와 반대로 승률 .508에 불과했던 두산이 강력한 우승후보 삼성을 이기며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우승을 차지했다. 실패로 끝난 양대리그제가 폐지되고 다시 단일리그로 돌아왔으며 [[기아]]에서 자금난을 겪던 해태를 인수하여 [[KIA 타이거즈]]로 거듭났다. [[한국프로야구/2002년|2002년]]에는 준우승만 7번 하며 이를 갈았던 삼성이 이승엽의 극적인 동점 쓰리런과 곧이어 터진 마해영의 기적같은 끝내기로 창단 20년만에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다.[* 1985년의 우승은 '''한국시리즈 없이''' 했던 통합우승이라 당시는 삼성 구단에서조차 외면받았던 우승이다. 물론 현재는 1985년을 V1, 2002년을 V2로 계산한다.] 하지만 2002년 한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우리 대표팀이 4강 신화를 쓰면서 프로야구의 인기는 이제 프로축구에 완전히 밀리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 유명한 경기장 내에 자전거 타고 돌아다녔던 사진이 이때 등장해 당시 프로야구 암흑기를 상징하는 사진중 하나가 되었다.] [[한국프로야구/2003년|2003년]]에는 선발 21연승을 기록한 [[정민태]]를 앞세운 현대가 3번째 우승을 차지한 가운데 "국민타자" 이승엽이 (당시) 아시아 신기록인 56홈런을 쏘아올리며 그의 홈런볼을 잡기 위해 관중석에서는 잠자리채 열풍이 불기도 했다. [[한국프로야구/2004년|2004년]]에도 홈런타자 브룸바와 클로저 [[조용준]]의 현대가 배영수가 준-노히트[* 10이닝 노히트를 기록했으나 경기가 끝나지 않아 정식 노히트로 기록되지 못했다.]를 기록한 삼성을 9차전 우중 혈투 끝에 꺾으며 4번째 우승을 달성, 이견이 없는 당대 최강팀의 위치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 해 발생한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에 수십 명이 연루되며 프로야구는 또다시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삿포로 참사(야구)|삿포로의 굴욕]]이라 칭하는 '2003 삿포로 아시아선수권 대회 겸 2004 아테네 올림픽 아시아예선대회'에서의 참패[* 대만전 4:5 패, 일본전 2:0 패.]로 인하여 [[2004 아테네 올림픽]] 출전권을 얻지 못했다. 2000년대 이후 A급 야구대표팀의 3번의 실패 사례 [[한국프로야구/2005년|2005년]]에는 백업 김재걸의 미친 활약과 오승환, 권오준 등 강력한 불펜을 보유한 삼성이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프로야구/2006년|2006년]]에도 "푸른 피의 에이스" 배영수와 막강 불펜의 삼성이 한화를 스윕하며 2년 연속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2005년에는 오승환, 2006년에는 류현진 한국을 대표하는 두 투수가 데뷔 무대를 가졌으며 두 선수 모두 신인상을 수상했다.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우리 대표팀이 "[[약속의 8회]]"에 터진 이승엽의 역전 투런으로 한일전 승리에 이어 MLB 올스타를 끌고 온 미국마저 꺾으며 4강에 진출해 2년 전 [[삿포로 참사(야구)|삿포로 참사]]의 아픔을 말끔히 씻어냈다. 자세한 내용은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본선 2라운드/1조 5경기]]와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본선 2라운드/1조 3경기]] 참조. 다만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야구|도하 참사]]와 [[타이중 참사]]가 연달아 터지며 이 흥행을 이어나가지는 못했다. [[한국프로야구/2007년|2007년]]에는 [[김성근]]의 SK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2007년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차지하고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3차전 타선 대폭발과 4차전 신인 [[김광현]]의 역투로 분위기를 반전시켜 극적으로 창단 첫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다만 이 과정이 매우 저열해 [[2007년 한국시리즈]]는 사상 최악의 한국시리즈로 남았다. 자세한 내용은 [[2007년 한국시리즈]] 참조. 또한 현대는 재정난에 골골대다 결국 시즌 끝나고 해체를 선언했다. 한 시대를 지배할 정도로 강력한 팀이었으나 모기업이 야구단에 관심을 끊었고 연고권도 없어 신인 수급도 하지 못해 쓸쓸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농업협동조합]], [[STX]], [[KT]] 등이 인수를 추진했으나 모두 무산되었고 결국 [[이장석]]의 창업 투자 회사인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가 팀을 인수하며 다음 해부터 [[우리 히어로즈]]라는 이름을 달고 뛰게 되었다. 또한 이 해는 KBO 사상 가장 미스터리한 해로 꼽히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2007년 한국프로야구 미스터리]] 참조. ---- || [youtube(TDXwy-_Dj70)] || [youtube(yjMnRgAhayw)] || ||<-2> 1차 암흑기 당시 발생한 벤치클리어링 모음집 || IMF 위기, 양대리그 실패, 스타 유출, 국제대회 부진,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병역비리]], 집단 난투극[* 특히 두산과 LG의 어린이날 난투극], 인기 팀들인 [[엘롯기]]의 부진 등 여러 악재들로 얼룩진 암흑기였다. 롯데는 그 유명한 [[8888577]]을 찍었고, KIA도 2002년, 2003년에는 정규리그 2위를 차지할 만큼 강력했으나 2005년과 2007년에는 최하위를 기록했다. 여기에 LG마저 [[6668587667]]을 찍어 인기를 책임져야 할 [[엘롯기]] 모두가 부진한 최악의 암흑기였다. 2002년에는 월드컵 축구 열기에 완전히 잠식되어 8개구단 체제 이후 최저 관객인 230만 관객이라는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었고, 이듬해 [[이승엽]]의 홈런쇼로 이슈몰이를 하는 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2003년 삼성의 이승엽-[[마해영]]-[[양준혁]]은 가히 괴물타선이었다.], 이승엽의 홈구장인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의 작은 구장규모[* 당시만해도 10,000명만 수용이 가능했다. 현재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로 옮겨 이보다 많은 수용석이 늘어나게 되었다.]로 인해 관중 파급효과는 크지 않았다.[* 구장이 작아서 관중몰이를 덜하게 된 것 뿐 타팀들이 하락세를 탄 상태에서 거의 유일하게 상승세를 탄 삼성 팬덤이 대단한 강세를 보였고 이 때문에 2003년 올스타전 동군은 2루수 고지행을 제외한 모든 포지션에 삼성선수들이 선발로 뽑혀서 사실상 삼성 단일팀이 되어버렸다.] 그마저도 이듬해인 2004년 이승엽이 [[치바 롯데 마린즈]]로 이적하면서 인기는 다시 사그라들었다. 1차 전성기에서 500만까지 올라갔던 관중 수는 급격하게 감소하며 2000~04년에는 200만명대에 머물렀다. 그나마 2005년부터는 다시 반등하기 시작해 2007년에는 400만 선까지 회복했다. 이는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의 흥행으로 한국 야구의 국제적 위상이 본격적으로 상승했기 때문. 특히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본선 2라운드/1조 3경기]]가 컸다. 인기 하락에 관해 개별팀을 살펴보면 최고 인기팀 해태는 이종범이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주니치]]로 진출하고 [[임창용]]을 삼성에 보내는 등 스타의 부재현상이 생겼고 팀 성적도 추락했다. 돌풍을 일으킨적이 있는 쌍방울은 애초에 전주라는 상대적으로 작은 시장을 연고로 하였는데 모기업의 문제로 선수까지 죄다 팔고 성적도 바닥으로 떨어지자 팬심이 다 떠나게 되었다. 1999년 준우승 이후 롯데는 2000년대 초반 최악의 경기력으로 [[8888577]]을 찍으며 관중이 100명도 안가는 사례가 나올 정도로 망가졌다. 매년 우승부터 꼴찌까지 순위가 갈라지는게 당연한 프로리그지만 팀이 단순히 성적하락이 아닌 진짜 망가져버렸다는 인식을 주어서 꿈도 희망도 없는 상태가 되었던 것. 반면 이 기간 구단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보낸 현대는 연고 이전 여파로 팬들을 거의 다 잃으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음에도 매진을 시키지 못하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당시 현대의 야반도주 이후 인천 야구팬은 현대 또는 SK 팬, 그리고 야구에 관심을 끊는 팬으로 뿔뿔히 흩어졌다. 결국 현대와 SK 모두 비인기팀이 되었고 그나마 SK는 2000년대 중후반 화려한 전성기를 보내며 인천팬들의 지지를 회복했지만 현대는 그런 거 없이 해체의 길을 걷고 말았다. * [[한국프로야구/1998년]] * [[한국프로야구/1999년]] * [[한국프로야구/2000년]] * [[한국프로야구/2001년]] * [[한국프로야구/2002년]] * [[한국프로야구/2003년]] * [[한국프로야구/2004년]] * [[한국프로야구/2005년]] * [[한국프로야구/2006년]] * [[한국프로야구/2007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